김호일의 문화 칼럼

2013년 12월3일 Facebook 첫 번째 이야기

김호일의 블로그 2013. 12. 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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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준비중인 특별기획전 고식 김희락(金熙洛)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숙명(淑明), 호는 고식헌(故寔軒)이다. 이조참의에 증직된 두동(斗東)의 아들로 태어나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몇 달 뒤에 시행된 도산(陶山) 응제(應製, 임금의 특명으로 임시로 치르던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94년 규장각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혀 궁중을 출입하면서 과제(課製)와 조대(條對)에서 종종 장원하였다. 이후 삼조(三曹)의 낭관(郞官)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자원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해동인물고(海東人物攷)》, 《영남명신록》,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고식(故寔)》 5권 3책이 있다"
    의 일대기 < 조선시대의 등용문 > 전시기획을 하면서 알게된 그의 후손 " 김용환"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파락호(破落戶)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던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만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등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들이기도 했습니다.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알려진 사람 중에 김용환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학봉(鶴峯) 김성일 선생의 후손으로서, 그는 대를 이어 내려오던 종가 땅 18만 평에 이르는 전답은 물론 종택마저 도박을 통해 날리고 말았습니다. 종택이 팔릴 때마다 종가 어른들이 십시일반해서 다시 종택을 사들이면 다시 팔아 도박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다 팔아먹고도 “집안에서 학봉과 난봉의 두 봉황이 나왔으면 됐지” 하고 큰소리쳤다고 하니 정말로 파락호라 불릴만하지요. 심지어 무남독녀 외동딸을 시집보낼 때, 사돈댁에서 어려운 사정을 알고 혼수로 농 하나 사오라고 돈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돈조차 도박에 써버렸다고 합니다. 딸은 어쩔 수가 없이 할머니가 쓰던 헌 오동나무 삼층장을 혼수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름난 명문 종가댁 딸을 며느리로 삼아 데려왔더니 아비가 파락호, 농 사오라고 보낸 돈으로 도박을 하고 헌 농을 들고 왔으니 시댁에서 화가 난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시댁에서는 파락호의 귀신 씌운 농이라며 마을 강변 모래사장에 내놓고 불을 싸질러 버렸다고 합니다.

    김용환은 그렇게 파락호, 불한당의 오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후일에 학자들이 밝혀낸 자료에 의하면 서북간도 항일 투쟁군의 군자금을 몰래 대오던 책임자가 바로 김용환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을 나라를 찾는 일에 말없이 대고 있었던 것이었죠. 생각해보면 파락호로 난봉꾼으로 살았던 것은 모두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종가 사람들과 아내와 딸에게마저도 난봉꾼으로 원망을 받으면서도 끝내 모든 사실을 숨기고 오명을 뒤집어쓴 채 그는 죽었습니다. 어찌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나 이런 사람이었다고 내가 한 일은 이런 일이었다고 어떻게 한 마디 말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 감당하기 어려웠을 오명을 어찌 모두 끌어안고 눈을 감을 수가 있었을까, 그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밝혀져 김용환은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게 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 누구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재산을 늘려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내 재산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냐 할지 몰라도 때로는 실망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 재벌가의 아들이 직원을 매질하고 맷값이라며 돈을 건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얼마나 마음이 씁쓸하던지요.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진 소유를 통해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이들이 있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김용환, 그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김후옹여사는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2014년 해금강테마박물관 특별전시기획전 < 조선시대의 등용문 > 전에 받칩니다.

    조선의 타짜라 알려졌던 김용환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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