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일의 문화 칼럼

2014년 2월11일 Facebook 첫 번째 이야기

김호일의 블로그 2014. 2. 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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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기다리세요"… 거제에서 단 1명 '이산가족상봉' 대상자 선정
    박모씨, 1972년 오대양호 사건으로 납북된 형 만나러 '금강산 行'

    오는 20~25일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이산가족상봉 행사에 거제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이 대상자로 선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지난 6일 북측에 통보한 상봉자 명단은 모두 85명으로 알려졌으며, 이 가운데 거제사람 1명이 포함된 것이다.

    기자는 이 기사를 보도하면서 대상자 박모씨(55)의 실명과 주소, 직업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알아낸 그의 삼촌과 숙모 등의 정확한 인적사항에 대해서도 부득이하게 밝힐 수 없음을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와 함께 박씨가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형의 인적사항에 대해 밝힐 수 없음을 거듭 이해를 부탁드린다.

    그것은 취재를 거부하는 박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칫 기자의 보도에 대한 욕심으로 그 동안 그의 그런 아픔을 몰랐던 주변 지인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앞으로 그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이젠 밝힐 수도 있을 만큼 세상이 달라졌고, 이산의 아픔을 모든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몇 일 간에 걸친 기자의 끈질긴 설득에 박씨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의 주변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의 가족사가 언론에 보도 될 경우 앞으로 사회생활 하는데 큰 지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안하지만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런 때문에 기자는 장목면에 거주하고 있는 박씨의 삼촌 박모씨(82)와 숙모 김모씨(79)를 통해 박씨가 꿈속에서 그려왔던 그의 형과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박씨 형제를 갈라놓은 42년 전 발생한 오대양호 사건
    박씨가 그 형과 생이별은 지난 1972년 12월28일 서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쌍끌이 어선 오대양 61.62호가 북한 경비정의 공격을 받고 선원 25명이 황해도 해주항으로 전원 나포됐던 이른바 ‘오대양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가 그의 형과 생이별한 것도 42년의 세월이다.

    이 당시 박씨는 12세, 형의 나이는 16세였다. 박씨의 형은 납북된 25명의 선원 중 막내였다.

    납북된 박씨의 형은 형제 중 둘째로 호적상에 기재된 이름과 집에서 부르는 아명 등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박씨의 큰 형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박씨의 삼촌과 숙모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했다). 박씨의 삼형제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납북된 형과 본인 두 명이다.

    박씨의 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이 컸던 박씨의 형은 동네에서 선장을 하던 박모씨의 권유로 배(오대양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그해(오대양호가 납북된 1972년) 겨울, 박씨의 형은 부산항에서 오대양호에 몸을 싣고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동경과 두려움의 저 바다를 향해 길을 떠났다. 16살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천근과도 삶의 무게가 어떠했을까.

    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의 형’은 찢어지는 가난과 맞서며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매스컴과 통신시설의 열악했던 탓에 삼촌과 숙모는 오대양호가 나포됐다는 소식을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받았는지 정확히 기억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자료를 보면 이 당시 나포된 25명의 선원 전원 가운데 장목면 출신의 선원이 무려 18명에 달하면서 마을 전체는 울음바다로 변했고, 사랑하는 무모 형제의 생사를 확인할 수조차도 없었던 당사자들은 발만 동동 구른 채 눈물로 지새는 날이 지속됐다.

    그런 와중에도 관계당국의 감시의 눈초리는 납북자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부모형제의 생사도 모른 채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들을 마치 ‘범죄자 취급’ 하며 감시하는 관계당국에 항의조차 못하고 '숨 막히는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아예 이 당시 이 마을에는 정보당국에서 파견된 한 요원이 신분을 속인체 상주하며 마을 사람들의 동태를 일일이 감시해 왔던 사실이 증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모씨는 "한 청년이 방을 얻어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청년은 어머니가 교도소에 가서 몸을 수양하러 왔다면서 오랫동안 이 마을에 거주했다"고 말했다.

    또 "그 사람은 그 당시 도저히 이런 시골에서 살 이유가 없었고, 동네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경계했다"면서 "이 정체불명의 청년이 납북자가족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자식을 가슴에 품은 채 '통곡의 세월'을 살다 간 어머니
    생때같은 자식의 납북 소식에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것도 아직도 부모 품에서 응석받이로 자라야 할 아들이 생사조차 확인 할 수 없었으니 그 심정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 당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부산항에서 하역 일을 하던 박씨의 아버지는 자식의 납북을 전후해 작고 한 것으로 박씨의 숙모는 전하고 있다. 박씨의 아버지는 지금 생존해 있다면 95세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면서 작고한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기억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박씨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박씨의 어머니는 자식의 납북 소식을 알고는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당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박씨의 어머니는 시부모에게 누가 될까 싶어 집안에서 그 슬픔을 내색하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았다.

    때때로 어머니는 뒷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그리며 목 놓아 울었고, 그 한(恨) 맺힌 절규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고 전한다. 박씨의 숙모는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가도 한 순간 넋을 놓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을 했다. 그 울음소리를 듣는 동네 사람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했다"고 했다. 숙모는 그 통곡의 세월을 살다간 박씨의 어머니를 한 동안 생각하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숙모는 "통탄할 일은 박씨의 어머니가 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으니 눈을 감을 수 있었겠냐"고 기자에게 반문했다.

    박씨의 형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가족들의 귀에 들려왔다.

    박씨의 숙모는 "언젠가(2000년 8월) 이산가족 찾기에서 오대양호 사건으로 납북되었던 김모씨가 동생을 찾았는데, 이들의 대화 과정에서 박씨의 형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그 땐 이미 형님(박씨의 어머니)이 세상을 하직한 뒤였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박씨의 형이 북한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이들 김씨 형제의 극적인 상봉을 통해 전해졌다고 한다.

    기자를 통해 조카가 이번 상봉행사에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한 박씨의 삼촌과 숙모는 "당장이라도 함께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면서 "아무쪼록 이번에는 무산되지 않고 별 탈 없이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겠다"고 마음을 전했다.

    박씨가 전화를 통해 남긴 마지막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정치적으로 잘못되어 또 무산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인터뷰에 응하지 못해 미안하다. 기자의 고충을 이해한다"

    기자는 충분한 취재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산가족의 슬픔을 함께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이산가족상봉이 오늘로부터 10일이 남았다.

    이 기간 동안 아무 탈 없이 이산가족의 상봉이 성사되어 박씨 형제가 마음껏 형제애를 나누길 간절히 바란다.

    42년의 세월을 채우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짧지만...[거제시민뉴스 기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