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소식

거제포로수용소

김호일의 블로그 2011. 6. 27. 11:33

이 글은 김중섭(95년 작고)선생의 생전 자서전에 적은 내용의 일부로, 육이오 전쟁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생활까지를 기록한 실제 경험만을 발췌한 것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인민군에 끌려간 후 부터 거제포로수용소 생활에서 경험한 내용을 통해서 다소나마 전쟁의 불행과 평화의 가치를 짚어보고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가치와 의미를 새기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전쟁의 비극적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위하여 기고 한다.

 

글 쓴이 / 김중섭

1925 914일생/ 1938년 봉화공립소학교 졸 / 1939년 중동학교입학/ 1946년 성균관대학교 상과입학

 

 

 

 

 

6.25사변

 

 

1950 6월 어느 날이었다.

아버님께서 시골에 맡겨 놓은 큰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 오셔서 며칠을 묵으시다가 내려가시는 날이다.

아침 일곱시에 떠나는 안동행 기차를 타실 아버님을 모시고 여섯시 반 경에 청량리 역에 나갔다.

떠나시는 아버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사람이 소에 짐을 가득 싣고 역 앞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웬 짐을 아침부터 그렇게 많이도 싣고 가세요?”

허겁지겁 그 사람이 한마디 했다.

 

전쟁이 났어요.”

 

?”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 평화스런 해방 조국에 무슨 전쟁이 났단 말인가? 1945년 해방이 되고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려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38선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합되어 진정으로 독립한 대한민국이 건설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쟁이라니!

 

그 때까지만 해도 북측이 남쪽을 향하여 무력 도발을 하거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엇인가 큰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인간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을 갑자기 당하면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는가 보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 상을 받았다.

 

전쟁이 났대. 이북에서 쳐들어 왔대.”

 

그 때서야 나는 정신을 좀 가다듬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 또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침상을 물리고 돈암교에 살고 있는 종매부 고병익 교수 댁을 가려고 집을 나왔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휴가 나온 장병들은 급히 부대로 귀대하시오.”

 

큰 길로 나가니, 군 트럭이 황급하게 오고 가면서 종이 나팔로 가두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전기를 사용하는 마이크가 없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많은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려면 종이 나팔을 말아 입에 대고 소리를 지를 때였다.

 

돈암교에 가는 동안 그런 군대 차량을 서너 대나 보았다.

정말 전쟁이 났나 본데?”

 

25, 그 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서는 외출을 나온 군인들이 많았다.

군인들은 빨리 부대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 때서야 전쟁이 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매부집에 갔더니 고 박사도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둘이 만났으나 전쟁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나올리가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집으로 돌아 오며 걱정은 태산 같이 커졌다.

전쟁이 났다고 하여도 동족끼리의 싸움이니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신설동 같은 민가(民家)지역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마음이 평정되었다.

 

뒤이어 종매 고박사 부인이 피난을 가자고 우리 집에 왔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달랐다.

아이들 둘을 데리고 어디로 피난을 갈 수 있나? 민가에는 폭격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여기에 있자!”

내 말을 듣고 아내도 내 의견에 동조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삽시다!”

 

종매가 가고 저녁이 되었다.

아무래도 비상식량이 필요할 것 같아 오징어포 등 일부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걱정 속 26일 새벽을 맞았다.

 

대문을 열고 나가 건너편 대령 집을 쳐다 보았다.

그 집은 벌써 집을 비우고 떠나고 없었다.

거리는 태풍전야와 같이 적막에 쌓인 가운데 먼 데서 쿵쿵 포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낮 열한 시쯤 쾅! 소리와 함께 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경동 고등학교 모퉁이에 박격포탄이 터졌다.

온 마을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삽시간에 뒤집혔다.

 

집집마다 서둘러 보따리를 싸고 피난길에 올랐다.

포탄 공격은 민가가 있는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안되겠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문전 옥답을 팔아 마련한 집을 비우고 떠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포탄은 코 앞에 떨어지고, 별다른 대책이 없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비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급한데로 싼 짐을 지고 두살 먹은 작은 아이는 아내가 업었다. 다섯 살 먹은 큰 아이는 손을 잡고 걸었다.

 

탑골 승방 산을 넘어 창신동 동덕여고를 거쳐 동대문에 왔다.

종로 쪽은 벌써 사람이 다니지 못 할 만큼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때 피난민 대열을 뚫고 군 차량 한 대가 지나면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아군은 의정부를 탈환하고 북으로 진격 중 입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 가십시오.”

 

방송은 생판 거짓말 이었다.

 

두 세시간 전에도 신설동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진격을 한다니...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난 군인들의 거리 방송을 믿지 않았다.

 

그 가까운 종로 5가에서 종로 4가까지 가는데 무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많은 인파 속에 어린것을 잃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었다.

종로 4가쯤 가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젯 밤에 한강 다리가 끊어졌다.”

 

 

 

나는 그 때서야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강을 건너려고 용산 쪽으로 가던 인파와 되돌아 오는 인파가 엉키고 설켜 제 자리 걸음을 하였다.

오후 다섯 시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종로 4가 일대에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리가 없었다. 현재 동국대학교 입구에 있던 묵정동 고모님 댁으로 발길을 옮겼다.

종로 4가에서 묵정동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다.

 

동대 입구에서 국군 한 사람을 만났다.

 

아저씨! 저기 남산에 국군이 있습니까? 아니면 인민군이 있습니까?”

 

전쟁이 났을 때에 전황을 알아 보려면 민간인이 군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세상은 갑자기 거꾸로 되었다.

 

군인이 민간인에게 전황을 묻고 있는 판이었다. 지휘 계통이 무너진 폐주병이 허겁지겁하는 모습을 보며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어떻게 해서 나라의 꼴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고 박사 부부도 묵정동으로 왔다. 고모와 고 박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 등은 밤새 천지가 진동하며 고막이 터질 것 같이 들려오는 포탄 소리와 탱크 소리를 들으며 27일 밤을 지새웠다.

28일 새벽이 되었다.

 

다섯 시경 포탄 소리가 멋기 시작했다.

고 박사와 살그머니 문을 여고 밖을 나왔다.

 

충무로 거리의 모든 집들의 창문은 박살나 있었다.

을지로 4가까지 걸어 갔다.

 

 

창경원 쪽과 을지로 입구 쪽에는 적군의 탱크가 수 없이 서 있고, 탱크마다 자기가 든 총신(銃身)보다 키가 작은 어린 군인이 타고 있었다.

 

우리 말고도 대여섯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그 어린 인민군 아이가 난데 없이 소리를 질렀다.

 

동무들! 귀 막으시오!”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남산을 향하여 탱크의 포탄이 불을 뿜었다.

날이 밝아지자 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어젯 밤에 임민군이 용산을 점령하고, 지금은 삼각지 근방에서 아군과 싸우고 있으며 곧 인민군이 한간을 넘는다고 하였다.

 

죽일 놈들!”

 

많은 사람들이 장면과 조병옥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하고 있었다.

 

시민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방송을 하면서 저희 들은 보따리를 싸가지고 자동차 타고 도망을 쳐? 거기다가 한강 다리까지 끊어? 천하에 이런 나쁜 놈들이 있나?”

 

하늘을 우러러 저주와 욕설과 원망의 소리가 폭발했다.

나는 시민을 버리고 간 정부도 나쁘지만, 그것 보다 시민들에게 적군을 격퇴하고 진격 중이라고 속인 것은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만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리 없이 적군 치하에 살게 되었다.

 

 

 

 

()과 북()

 

함정

 

신설동 집으로 돌아 왔다.

 

벌써 사방 팔방에 좌익 투사들이 완장을 차고 설치고 있었다.

인민군은 한강을 넘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인민공화국의 서울이 된 것이다.

우선 먹고 살 양식이 걱정 되었다.

 

대한민국 화폐는 이미 쓸모가 없는 세상이었다.

시골에서 보내준 모시, 무명, 삼베 몇 필을 싸들고 자전거 한 대를 구해서 청량리를 거쳐 양평에 갔다.

 

베 한 필에 쌀 한 말 단위로 물물 교환을 하였다.

 

이런 일을 며칠 동안 계속하여 쌀 한 가마를 간신히 마련 하였다.

광에 단지를 묻고 숨겨 놓았다. 성격이 비교적 꼼꼼한 편인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하루는 동네가 왁자지껄했다.

 

난리가 나기 전에는 몰랐으나 승방 잎에는 창고가 있었고, 그 창고 안에 수 백 짝의 명태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창고 문을 뜯고 앞 다투어 모두 가져 갔다.

7월 초순 국민학교가 개학 했고 하순에 중학교가 개학 하였다.

 

전세는 우리 측에 불리하여 아군은 금강까지 쫓겨나가 전투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마당에 있는 장독대가 반 지하실이라 공습이 있을 때는 아이들을 그곳에 넣고 피신 시키며, 나는 지하와 다락에 숨어사는 신세가 되었다.

 

숨어서 살면서도 마침 우리 살림집 근처에 좌익 성향을 가진 두 친구가 살고 있어 매일 매일 변하는 전황을 들을 수 있었다.

고향 동네 옆집에 사는 김중우(金重禹)는 나와 함께 성균관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인민공화국의 당원이 되어 우리 학교 자치위원회 선전부를 맡고 있었고, 다른 한 친구는 안동 거부의 아들이며 외가가 우리 동네이고 처가가 나와 같은 경북 월성군 경주의 양동마을로 나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맥아더 사령부가 인천에 상륙한다는 등 비교적 빠르고 정확한 전황을 듣고 있었다.

 

 

 

8 4, 김중우가 찾아 왔다.

여러가지 전세(戰勢)와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등록을 하고 학생증을 받은 다음, 그 증명서를 가지고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있다가 세상이 수습되면 서울로 올라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고마운 친구였다

중우의 말을 듣고 다음날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학교까지 걸어 갔다.

학교에 가는 동안 검문은 받지 않았으나 그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성균관 대학교 경학원에 들어서면 개천가에 큰 솔밭이 있고, 명륜당에 들어서면 웬 쪽에 큰 구렁텅이가 있다.

 

모처럼 보는 학교였다.

5일 아침 열 시 반경 솔밭을 지나 학교에 들어가는데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쳐다 보았다.

 

피고는 명륜동 통장이었고, 재판장은 서북청년회 간부였던 우리 반 학생이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찌하여 엊그제까지 공산당이 싫어서 자유를 찾아 서울로 넘어 왔다며 공산당은 때려 부숴야 한다며 외쳐 되던 친구가 하루 아침에 빨갱이의 앞잡이가 되어 재판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재판은 일사천리였다.

 

재판장의 판결에 따르면 옳소!”동의요!”소리에 이어 박수가 터지더니 곧 바로 현장에서 총살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광경이었다.

 

천하재사 라고 하더라도 인민 재판에 걸려들면 살아날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어이 없는 광경을 보고학교에 들어가 자치위원회 사무실에 갔다.

 

철정과 2학년 김중섭입니다.”

알겠습니다. 명륜당에 들어가 있으시오.”

명륜당에는 2, 30여 명의 학생들이 와 있었다.

 

대부분이 좌. 우익 정치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학생들 이었다.

서로 전쟁 중 겪은 이야기와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학생증이 배부되기를 기다렸다.

아마 열한 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트럭 두대가 명륜당 앞에 멎었고 자치위원회 간부 학생들이 들어왔다.

 

동무들! 잠시 후 시내에서 대회가 있는데, 동무들이 우리 대학을 대표해서 그 대회에 갔다 와야겠습니다. 학생증은 돌아온 다음에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조금 의심이 가는 바도 없지 않았으나 자치회 간부들의 말을 거역할 용기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시키는 데로 모두 트럭에 탓다.

차는 창경원 앞을 지나 종로를 거쳐 미도파 앞을 달리더니 곧이어 퇴계로 방면으로 핸들을 꺽었다. 드디어 트럭은 현재 극동빌딩이 들어서 있는 일신국민학교 교정으로 쏜살같이 들어 섰다.

 

모두 내렸!”

 

운동장에는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분위기는 삼엄하기 그지 없었다.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이 줄줄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꼼짝 달삭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학교로 가도록 한 친구 중우가 이런 사실을 알면서 고의로 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당시 광신상업학교를 다니던 열 네살 먹은 중우의 동생 중용이도 끌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지 못한 우리들은 운동장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해가 저물고 깜깜한 밤이 되자 인민군들은 행렬을 지우더니 백여명씩 조를 짜서 교실에 배치 하였다.

 

소금을 바른 주먹밥 한 덩이를 주고는 잠시 후 팬티만 입고 다른 옷은 다 벗으라고 명령했다.

신체 검사를 받고 옷을 벗었던 교실에 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옷 속에 있던 돈을 비롯하여 소지품은 깡그리 없어진 후였다.

날 바닥에서 그 날 밤을 지새고, 다음날 운동장에 나가 8열 종대로 줄을 섰다.

 

2미터 간격으로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이 지키는 가운데 행진이 시작 되었다.

행렬은 방산시장 옆 영희국민학교로 들어 갔다.

 

아침 점심을 굶은 우리들에게 또 주먹밥이 나왔다.

오후 6시경, 앞에서부터 또 행진이 시작 되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은 물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눈 앞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선했다. , 나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낯선 대지(大地)

 

 

대열은 을지로 4가와 종로 4가를 거쳐 창경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북으로 끌려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 여덟 시경이다. 행렬이 혜화동 로터리쯤 도착 하였을 때 갑자기 공습이 있었다.

공습을 피해 여기 저기 숨었다.

 

도망을 치려면 이 때가 기회인데 나는 어려서부터 엄한 부친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명령을 거역하거나 현실을 타파하는 노력이 적었고, 같은 또래 젊은이들에 비해 담력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른께서는 말을 듣지 않으면 회초리 열 개를 해 오라고 명령하셨다.

목침(木沈) 위에 나를 올려 세워 놓고 아버님은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때리셨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므로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데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런 가정 교육이 결함이 있기는 하나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데에 있어서는 가장 좋은 교육이다.

요즘처럼 아이들을 놓아서 기르면 성장한 후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기 쉽다.

나는 허겁지겁 길가에 있는 옹기점에 뛰어들어 옹기 뒤에 몸을 피했다.

 

도망 치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잠시 집 생각이 났다.

 

학교에 간다고 나가서 밤이 되어도 오지 않는 사람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공습이 끝난 다음 집합 명령이 내려졌다.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성북동과 돈암동을 거쳐 행렬은 미아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데...”

 

정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를 눈물로 넘었다.

 

 

 

고개를 넘으면 간혹 길가에 주막이 있을 뿐 허허 벌판이다.

길게 늘어선 대열은 아침이 되어서 의정부에 도착 하였다.

주먹밥을 얻어먹고 또 걷기 시작했다.

 

동두천을 거쳐 한탄강에 도착하였다.

모두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시퍼런 강물을 건넜다.

여기부터 6.25 발발 전 38선 이북인 이북 땅이다.

 

이 길만 따라서 계속 가라!”

 

보초도 세우지 않고 흩어져 걷게 했다.

 

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방목한 짐승신세가 된 것이다.

이제는 뛰어 봤자 이북 땅이요, 도망을 쳐 봤자 공산당 사회였다.

 

가는 도중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먹을 곳이 없었다. 한참을 가다가 민간인을 만났다.

나는 반바지에 힌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당시 서울 사람들은 힌고무신을 신고 살 때였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빈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당시 이북과 이남의 비공식 화폐 교환율은 1 5의 비율이었다.

 

물자가 귀한 이북에서 달걀 하나에 5원이었으니까, 이남 돈으로 치면 무려 25원이었다.

배가 고팠다.

 

소지품을 주면서 고구마를 사먹었다. 남대문에서 고물로 싸구려 손목시계를 보여 주었더니, 아들 장가 갈 때 예물로 쓰겠다며 사는 사람이 있었다.

 

해방이 된지 5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남북의 경제적 차이가 상당히 벌어진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북으로 북으로 정처 없이 시키는 데로 걸어 갔다. 날이 저물었다. 길가의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도착하는 데로 주먹밥을 나누어 주고, 어느 학교 안으로 들어가 자라고 했다.

 

뜻밖에 붙잡혀 북으로 왔으므로 서울 생각, 고향 생각, 아내 생각, 아이들 생각, 부모님 생각에 잠이 올리가 없었으나 몸이 피곤 했던지 움추리고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북 땅에서 잤던 밤이다.

 

다음 날 아침 또 가라고 했다. 어디쯤이 되었을까, 어느 기차 역 앞에 도착 했다.타라고 했다.

거기에는 화물차가 있었다. 타라고 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짐짝처럼 화물칸에 올라 탔다. 캄캄한 밤중에 달리던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렸다.

 

기차는 약수터와 표주박으로 유명한 서광사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원산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광사는 원산에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기차는 평양에 도착 하였다.

 

평양! 이곳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들이 마음 속으로 동경하던 정다운 도시로 가보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강제로 끌려와서 처음 보는 평양은 내나라 내 땅의 정다은 도시와 같지 않았다.

마치 낯선 대지위에 떠 있는 공허한 도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에서 내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떤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수천 명이 일시에 들어가 국밥을 먹었다. 아침 식사 후 다시 대열을 정리하고 기차를 타라고 했다.

 

평양에서 또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일까? 차차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멈춘 곳은 개천(介川)이었고, 우리는 개천 야영훈련소에 입소하여 바로 머리를 삭발 당했다.

 

며칠 전까지 서울에서 성균관 대학교 학생의 신분이었던 나는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인민공화국의 인민군이 된 것이다.

 

 

 

 

진남포 593부대 문화부

 

며칠 후 8.15 해방 경축 기념 행사가 있었다.

인공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수 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연사가 등단 했다.

연사는 다름 아닌 박계주 였다.

공산당들이 상투적으로 늘어 놓는 미사어구와 투쟁 의식을 고취하는 축사였던 것으로 기억 된다.

 

이게 웬 일이야?”

어느 날 홍만식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홍 선생님은 최기동씨의 사위로 중동학교 교장을 하시던 분이고, 내가 3학년 떼에 담임을 맡으셨던 분이다.

몸이 바짝 마르고 키가 큰 선생님께서는 눈물로 반기시며 손을 잡아 주셨다.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군대 훈련을 받았고 선생님께서는 나이가 드셨기 때문에 산으로 노력 동원을 나가고 있었으나, 그 후 선생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

 

한 보름 정도 훈련을 받다가 병이 났다.

군대에서 병이 나면 부대에 떨어져 있는 야전 병원으로 옮겼는데, 야전 병원은 어느 국민학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햇볕을 받으며 누워서 지내고, 밤이 되면 학교에 내려와 잠을 자는 것이 병원 생활의 전부였다.

간호원을 비롯하여 병원 종사자들 중에는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만주에서 살던 조선인 2세들이 군에 나가 8로군(八路軍)에 소속되어 6.25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릴 7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기다리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한 해 두 해도 아니요 7년이란 긴 세월을 가뭄으로 지냈으니, 얼마나 도탄에서 허덕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얼마든지 농토를 준다. 땅은 얼마든지 있다.”

 

정부의 권유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갔다.

내가 이북에서 본 경상도 사람들은 아마도 그 때에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 이거나 그들의 2세가 아닌가 한다.

 

환자라고 해서 그냥 놓아 두는 것이 아니다. 낮에는 산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한 사람씩 불러 세워 소위 자아비판(自我批判)이라는 교육을 시켰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해 온 모든 환경과 사안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비판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나는 부잣집 자손으로 부모덕에 편하게 대학을 다니다가 끌려온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의 판단 기준으로 보면 악덕 지주(地主)계급 출신이고, 공산 사회에서는 비판 숙청의 대상이 되는 악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동무들! 우리 인민군이 이남 전체를 해방 시켰오. 여러 동무들의 신원이 모두 파악되어 잘 알고 있소. 하나도 숨기지 말고 낱낱이 비판해야 하오.”

 

이런 엄포를 놓으며 계속되는 자아비판을 통하여 그들은 공산주의에 합당한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한 세뇌 교육을 계속 했다.

 

자아비판 이외에 병원에는 위문을 왔다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많은 연사들이 찾아왔다.

그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이남 해군 함장 출신이었고, 또 한 사람은 안동 출신이었다.

해방 후 인천항에서는 소금을 2천 톤이나 싣고 이북으로 월북한 해군 구축함 함장이 있었다.

그 사람이 이북에 와서 영웅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소련, 중국 다 다니고 이북 천지를 휘돌아 다니며 공산주의 선전에 열을 토하고 있었다.

체구가 좋고 인민군 중좌 계급장을 달았던 또 다른 연사는 자기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권()아무개라 해서 유심히 쳐다 보았다.

공산사회가 좋다는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떠들고 갔다.

 

퇴원을 한 후 해군에 배치 되었다. 부대는 진남포 593부대였다.

진남포 시내를 들어가다 보면 웬쪽으로 사과밭이 있는데 그 사과밭 안에 부대가 있었고, 부대 본부는 그 안에 불란서 풍으로 지은 양옥집이었다.

 

이 때 배치된 인원 중에 학부 출신이 네 사람이 있었다.

 

명륜동에 살면서 경기중학을 나와 서울대 문리대를 다니다 끌려온 이해원, 서울 공대를 다니다가 끌려온 이정희, 서울대 예대를 다니다가 끌려온 원용봉, 그리고 성균관대를 다니다가 끌려온 나였다.

 

우리 네 사람은 부대의 문화부에 배치되어 대대 전투 속보와 벽보, 그리고 교육자료를 만들거나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중 이정희와 원용봉은 그림을 잘 그려서 만화와 벽보를 담당했다.

 

당시 이북 사회에서 중요한 교육 자료는 매일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하는 조선인민보였다.

 

이 신문의 제1면 상단(上段) 두단은 항상 전단(全段)으로 매일 전국 정치 교재가 기록되어 있었다.

군대는 물론이요 국민학교, 대학교, 농촌, 광산 할 것 없이 매일 아침, 오후, 저녁 세차례에 걸쳐 실시하는 정치 교육의 재료로 삼았다.

 

이남의 문맹률이 40퍼센트 정도이던 당시 이북의 문맹률은 60퍼센트가 넘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다수이지만 매일 하루 세차례의 교육을 실시하므로 그들은 입만 뻥끗하면 스탈린 대원수가 어떻고 김일성 원수가 어떻다는 등 줄줄이 터져 나온다.

요즈음 북한 영상을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지는 북한 사람들이, 아이들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지도자 동지가 어떻고 경애하는 어버이가 어떻다는 등 좌르르 떠들어 대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반복되는 세뇌 교육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쓰진 못하나 말은 잘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 알지는 못하나 맹목적으로 열광의 도가니 속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세뇌교육이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장관이 축구선수단을 이끌고 평야에 갔을 때에도 그런 광경이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축구장에 이르기까지 인민문화궁전에서 평양산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통일을 외쳐대고, 미친 듯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이북에 끌려가 처음 경험하였던 자아비판, 세뇌교육과 같은 공산주의 프로그램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지금 북한 땅은 그런 사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북(以北)실정

 

 

문화부 일을 보면 부대에서 떨어져 있는 대대본부에 가야 할 일이 많아 진남포 시내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대대 본부를 가면서 가끔 진남포에서 영화 구경을 했다.

영화라면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심취한 분야라서 일가견이 있었다.

 

 

북의 영화는 주로 전투 영화였지만 확실히 당시 남의 영화보다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

하루는 소비 조합을 가 보았다. 건빵과 센베이라고 부르는 밀가루로 만든 얇팍넓적한 과자, 검정고무신, 광목과 삼베 같은 질이 낮은 상품들이 있었다.

 

좋은 양복지라고 해야 무명으로 짠 양복지였다.

비단을 찾아 보았으나 없다는 대답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일상생활에 쓰는 모든 용품들이 질이 낮고 품귀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서울 같으면 돈이 없어서 못살망정 이 보다 좋은 물건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일제 때에 쓰던 인조견과 같이 조금 고급스런 물건이 보였다.

 

한 동안 인민학교 옆 산에 호를 파는 작업을 하였다.

참호 작업을 나가면서 만난 인민학교 선생한테 월급을 물어 보았더니, 교장이 1 2백원을 받고 평교사는 1천원을 받는다고 했다.

 

교장과 교사의 월급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 사람이 한달 동안 최저 생활비로 800원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 선생을 비롯하여 아내와 다른 식구들도 함께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이북 사회는 한사람이 벌어서 한가정이 살기에는 이미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회주의적 사회 구조가 뿌리내려, 어린이나 노인들은 탁아소나 양로원에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해야 한 가족이 살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인민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성되어 국가 근본 구조가 사회주의 바탕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사실 우리가 바라본 들판은 이 계획에 의하여 정리 되었는지 반듯반듯하고 수리 시설은 놀랄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남쪽은 수리 시설은 손조차 대지 못하였고, 미국 종교단체가 보내는 구호품을 타기 위하여 크리스천 행세를 하고, 열차 안의 의자를 떼어 갈 정도로 사회 기강이 문란하고 정리가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해방 후 38선으로 갈려 짧은 기간이 지났지만 남북의 차이는 너무나 컸고, 사회 구조가 너무나 대조적으로 변하고 있어서 이런 상태로 오래 간다면 우리나라의 장래가 어찌 될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히 염려 되었다.

 

북은 인민을 국가의 노예로 삼은 거대한 집단으로 변하고 있었으며, 기간 산업을 비롯한 군수 산업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었다.

남에서는 활명수 병에 공기구멍이 보일 정도로 유리 산업이 발달하지 못 하였으나 그들은 벌써 매끈한 판유리를 생산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판단해 볼 때에 해방 후 5년 동안 그들은 우리 모르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끝내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남에 있을 때에 이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시계 태엽을 감지도 못하는 야만인과 같은 소련군들이 북에 들어와 지나가는 사람의 시계를 빼앗아 팔목에 다 차고 나면 발목에 까지 찬다든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곱은 사람들이 호박을 날로 씹어 먹는다든지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70퍼센트는 북에 대한 과장된 악선전으로, 그저 30퍼센트 정도가 사실 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본 이북 사회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남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 정도가 과장된 이야기였다.

 

인민학교 옆 산에 호를 판곳에 나가서 보초를 서기 시작할 때에 처음에는 학교 선생들이 우리에게 접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우리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목이 마르다 는 핑계를 대고 민가에 들어가 물을 달라고 해 보았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물을 갖다 주었지만 묻는 말에 일체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두 집이 아니었다.

모든 집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5, 6일 동안 한 곳에 보초를 서러 다니면서 얼굴을 익힌 인민학교 선생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밤, 숙직을 하는 그에게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사람들이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젊은이들 대부분이 물자가 풍부한 남쪽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은 누구 하나 빼 놓지 않고 남으로 가고자 합니다. 여기는 물자가 없고 낙()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조직이 얼마나 철저한지 숨도 못 쉬지요. 그들이 당신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공산당 조직에 알려지면 온전치 못 할 것이므로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았다. 북은 이미 생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한 번은 진남포 기지 사령관 관사에 보초를 서러 갔다. 기지 사령관이라면 남쪽으로 보면 해군 사령관과 같은 곳이다.

 

민가와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었다.

정말 잘 살고 있었다.

 

대지는 엄청나게 컸다. 안에 들어 가면 건물 네체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관사에는 전기요가 깔린 침대가 있었고, 고급 라디오가 있었으며, 심지어 냉장고까지 있었다.

 

알고 보니 북은 이중 사회였다. 인민과 귀족이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인민들 중에서 귀족들의 생활은 보아도 못 본체, 들어도 못들은 체하는 장벽으로 완벽하게 갈라져 있었다.

 

만일 어떤 인민이 기지사령관 관사 같은 곳을 보고 나가서 실상을 이야기 하면 곧바로 보복이 돌아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귀족 사회의 실상은 밖에서 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는 인민들에게 전혀 전달이 되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맹목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다.

 

북의 사람들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팥을 콩이라 하면 팥도 콩으로 알아야 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활 터전에서 살아 남을 수 없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의 생활이 이렇거늘, 남쪽에 대한 견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왜곡되어 있었다.

 

남쪽 사람은 동포가 아니라 완전히 적이요, 원수로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서울 말씨나 경상도 말투로 말을 걸었으니 그들은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 했을 것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북은 참으로 삭막한 세상이었다.

 

 

서해 바다, 불꽃 바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서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에서는 따발총을 비롯하여 수류탄과 같은 총탄을 이미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당시 진행 중인 전쟁 무기의 상당 부분은 이북에서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일 없이 시간이 나면 산에 올라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서울 생각과 고향생각을 했다.

집을 나간 다음에 장기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을 두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얼마나 걱정을 할 것이며, 서울에 두고 온 처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한의 나날이었다.

거기다가 북에서 들으면 이남은 벌써 포항까지 해방을 시켰다고 떠들고 있으니 그렇다면 부모님과 처자가 있는 곳은 모두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서는 지주 계급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실 것이 분명 했다.

 

이 얼마나 서러운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10월 중순경까지는 훈련만 하고 보초만 섰으나 중순이 지난 후부터는 두 사람이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참호를 파기 시작하였다.

남쪽을 해방 시켰다면 구태여 후방 지역인 이곳에 참호를 팔 필요가 없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룻 밤은 산꼭데기 참호에 올라가 친구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중에 남녀 두 사람이 산 속에 나타났다. 누구일까? 순간 우리 참호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 누구 얏?”

손가락에 방아쇠에 갖다 대고 두 사람을 세웠다.

그 중에서 남자가 태연히 암호를 대며 꾸짖는 어투로 말을 했다.

동무들! 이거 후방에서 무엇을 하는 거야?”

뭐라고? 후방에서 무엇을 해?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남한에서 빨치산으로 활동을 하다가 우리가 있는 곳을 통과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후방에서 놀고 먹는다는 식의 불평을 하면서 지나갔다.

 

그들의 말을 듣고 의아해진 친구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왜 이런 사람이 밤중에 이 산을 지나고 있을까?

그리고 후방이니 어쩌니 하면서 불평을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상하다는 생각 이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10 20일경부터 일 것이다.

갑자기 밤바다 서해는 불꽃 바다가 되었다. 어두운 밤 바다에는 일몰과 더불어 난데 없이 전깃불이 켜지고, 밤이 깊어 질수록 수 많은 전깃불이 꽃밭이 되어 명멸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만 되면 나타나는 서해바다의 불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10 22일경 행군이 시작 되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총 한번 쏘아보지 않고 훈련만 한 나를 우등 사수로 뽑아 소련제 장총을 지급했다.

 

유효 사거리(射距離) 3천 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총이라고 했다.

장총을 내게 지급한 이유가 있었다. 가다가 위험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먼 데까지 사격을 하란 것이었다.

이어서 쌀 두 되와 탄알 200, 그리고 수류탄 2개를 지급했다.

행군을 하여 시내에 있는 부대 본부에 갔다.

 

부대 점검이 끝난 다음에 또 다시 행군이 시작 되었다.

가을비가 억수 같이 내려서 길은 한 없이 질퍽 했고, 도처에 물이 고인 웅덩이 천지였다.

군인들은 양말이 없었다.

 

그들은 양말대신 무명 두어 자로 된 발싸개라는 것을 지급하였고, 그것으로 발을 싼 다음 천으로 만든 군화를 신으면 행군준비는 끝이었다.

 

질퍽한 길을 걷자니 행군을 시작하자마자 군화에 물이 스며들어 발바닥에서는 찌걱찌걱 소리가 절로 났다.

 

시내 근처 야산 어느 굴 속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자고 23일경 진남포를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진행을 계속 했다.

 

그들은 북에 있는 신안주에 인민군을 집결시킨다고 설명했다.

어디쯤 갔을까, 멀리 바다 속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에 일장기(日帳旗)가 펄럭였다.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해방된 조국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일장기가 아니라 태극기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이 태극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포항까지 해방을 시켰다는데 진남포 앞 바다에 태극기가 펄럭일 수가 있을까?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어둠이 깔리면 행군을 시작했다.

 

가다가 보면 앞에서 신호탄이 오르고 이어서 뒤에서도 신호탄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공중에서 전투기가 나타나 그 신호탄 중간에 수없이 지상으로 사격을 하고 갔다.

거기에도 우익의 빨치산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익 빨치산들이 앞뒤에서 신호를 해주고, 이 신호에 따라 전투기들이 득달같이 나타나 행진을 하고 있는 인민군부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야간 공습이 있으면 행군 대열은 산과 들로 흩어졌다가 공습이 끝난 다음에 다시 국도에 올라왔다. 공습 후 국도에는 시체로 변한 인민군과 부상을 당한 인민군이 길바닥에 수두룩하게 깔려 있었다.

국도에서는 줄을 서지 않고 자유롭게 걸어갔다.  우리 네사람은 생사의 기로에 서서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며 먹지도 못하고 계속 부대를 따라 북으로 갔다.

 

어떤 때는 길가에 있는 집에 들어가 누룽지를 얻어다가 나누어 먹기도 하고, 전시라서 먹을 것이 없는 집이면 물 한 바가지를 얻어 먹고 행군을 계속 했다.

 

하루는 깊은 산의 높은 고개를 넘게 되었다.

구렁텅이에 무엇인가 허연 물체들이 보였다. 3, 40 구에 가까운 시체들이었다.

이러한 시체 더미를 고개를 넘으면서 두 곳이나 보았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좌익들이 후퇴하면서 반동으로 몰린 민간인들을 산 속에서 죽이고 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전투로 죽은 사람보다 보복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25일 세 시경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천(漢川)이었다.

 

 

 

 

 

()과 사()

 

북두칠성

 

한천에 집결한 인민군은 육군과 해군이었다. 우리 부대는 여기까지 오는 도중 전투가 없어 부상자가 없었으나 다른 부대들은 부상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부대를 정리한 후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되었다.

 

총알 200발과 수류탄 2발만 휴대하고 쌀과 담배 등 의 소지품은 다 내놓으시오.”

지시대로 부대 정리가 완료된 다음에 부대장이 말했다.

 

우리는 오늘 저녁 묘향산으로 간다. 이곳에서 묘향산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구길로 가면 80리 밖에 되지 않으나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산길로 가자면 고생은 덜 하나 180 리나 된다. 어렵기는 하지만 시간이 없으므로 우리 부대는 구길을 통과 한다.”

 

한천에서 출발하면서 우리 부대가 앞장을 섰고, 그 주에서도 나는 우등 사수라서 맨 앞줄에 섰다. 그리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맨 뒤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묘향산의 수림은 대단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아름드리 나무였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진 숲 속에 겨우 길이 나 있었다.

밤중에 이런 숲과 나무들을 통과하려면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큰 나무 뒤에 한복을 입은 우익 빨치산이 숨어 있어 우리의 생명을 위협했다. 그런 일은 두 번이나 발견되었다.

세 시간쯤 행군을 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바로 앞에서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포성이 울렸다.

정신 없이 땅에 바싹 엎드렸다.

포탄은 내가 엎드린 100미터 전방에서 발포하고 있었다.

가만히 엎드려서 살펴 보았다.

 

그들은 외국인 이었다. 영어로 말하고 있었고, 포탄이 터지면서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은 코가 큰 사람들이거나 흑인 병사들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서해안을 따라 올 때에 커다란 비행기 6, 70대가 편대를 이루며 하늘을 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동하는 우리 부대의 중간을 폭격하여 풍지박산을 내려고 유엔군이 공수 부대를 묘향산에 풀어 놓았던 것이다.

 

사격!”

 

지시가 떨어졌다. 난생 처음 총을 쏘았다. 소련 식 장총은 한 번에 다섯 개의 탄알을 탄창에 장전하여 발사하나, 한 번 쏠 때마다 일일이 후진 장치를 손으로 조작하고 다섯 발을 다 쏘면 탄창을 갈아 끼워야 하는 총이었다. 정신 없이 1, 2분 동안 방아쇠를 당겼다.

 

사격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 손가락이 들어갈 틈도 없이 하늘은 불꽃 놀이를 하는 것처럼 빛이 났고 포탄이 터질 때마다 번쩍번쩍하는 섬광으로 어둠에 쌓였던 땅은 환하게 밝았다.

직접 당해 보니 전투란 참 묘한 것이었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모르고 치열하게 싸움을 하다가도 한 쪽에서 응사를 하지 않으면 잠시 전투는 중단 되곤 했다.

30분간 전투가 계속 되었다. 부대 지휘부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을 했는지 후퇴 명령을 내렸다.

 

부대가 돌아서니, 전투 대열의 맨 앞에 있던 나는 맨 뒤에 서게 되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맞붙어 싸울 때는 앞에 서고 도망을 칠 때는 끝에 서니 죽음의 여신은 바로 내 코 앞과 등뒤를 얼씬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친구 네 사람은 늘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진남포에서 출발하면서도 신안주에 가면 만주에 가까운 곳이므로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데 뜻을 같이 한 우리는 서로 헤어지지말고 같이 다니자고 다짐을 했었다.

 

후퇴하는 화중에서도 서로 찾아 네 사람은 다시 만났다.

 

기회는 지금 밖에 없다.”

 

남은 총알과 총을 버리고 호신용으로 수류탄 두 개씩만 휴대하고 탈출 하기 시작 했다.

5리쯤 가다 보니 사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전투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맨 앞에 있었으므로 사격에서 오히려 안전할 수 있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쏜 포탄은 유효 사거리인 후방 2킬로미터 지점에 떨어져,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몰살 당했다.

 

급할 때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상자를 밟으며 줄달음을 쳤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무조건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그 반대 방향으로만 뛰었다. 그렇게 하면 남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면 가든 길을 멈추고 다래덩쿨에 숨어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무작정 남쪽을 향하여 걸었다.

배고픔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무우 밭이 보이면 무우를 뽑아 먹고, 고구마 밭이 보이면 고구마를 캐 먹었다. 음식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난생 처음 느꼈다. 옛날에는 호강하며 컸기 때문에 음식물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지 못 했다.

 

탈출의 행진은 사흘 밤이나 계속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숲 속에 숨어서 발싸개를 풀어 보았다. 발바닥은 물에 불어 터졌고, 다리는 강행군에 부어 올라 군화를 벗기도 어려웠다. 발싸개를 발바닥에서 떼어 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불어터진 발바닥의 구멍마다 까만 때가 끼어 있어 나뭇가지로 파냈더니 그 다음에는 아파서 걸을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걷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없었다.

 

4일 째는 정말 죽지 못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탈출 이후 처음으로 마을이 보였다.

먹을 것을 구하고 군인 옷을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하여 그 마을로 내려 가야 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서 붙잡히면 끝장이었다.

 

산에서 마을을 정찰해 본 결과 외딴집이 한 채 보였다. 우리는 그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입구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사나이가 창에 찔려 배가터져 죽은 채로 방치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인간의 내장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주인 계시오?”

외딴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 칠십 잡수신 노인이 나오셨다.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사정을 하였더니 고구마 찐것을 몇개 주었고, 헌 옷을 부탁하였더니 할머니가 자기 아들이 입던 누더기 옷을 내 주었다.

아마 지금 같으면 거지도 그런 옷은 입지 않을 것이다.

 

옷을 갈아 입으면서 몇가지 물어 보았다.

 

두 분이 사십니까?”

아들 4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인민군에게 끌려 갔다고 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조금만 더 가면 재경면(在京面) 소재지라고 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전혀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조금 더 걸어서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에는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이 얼마나 반가운 태극기란 말인가!

이제는 살았다!”

네 사람이 소리를 치며 면사무소를 찾아 줄달음을 쳤다.

 

 

 

찢어진 증명서

 

그러나 자치위원회의 분위기는 뜻밖으로 살벌했다.

너희들 빨갱이지?”

다짜고짜로 묻는 말이 빨갱이냐는 소리였다.

우리는 누누히 서울에서 끌려갔던 일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하였으나 취조하는 심의관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심의관들은 이미 빨갱이와는 철천지 원수가 된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이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부모, 형제, 처자가 공산당한테 처형 당한 사람들로 빨갱이만 보면 복수심이 북받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학교에 갔다가 강제로 끌려 온 사람들이고, 지금 탈출하여 오는 사람들 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손바닥을 내라고 하고 때리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몽둥이로 몸뚱어리를 때리며 바른 말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바른 데로 말을 해도 거짓말이라고 때리며 또 바른 말을 하라니, 꼼짝없이 때리는 데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때리고 맞는 일이 계속 되었다.

저녁이 되었다.

저 방에 가 있어!”

 

별로 크지 않은 방에 3, 40여 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방에 간신히 들어갔다. 만원 버스나 출근 인파로 가득찬 지하철을 탈 때처럼 밀고 들어가니 겨우 몸을 가눌 공간이 생겼다.

우리의 운명이 어찌될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캄캄한 밤중에 어디서인지 쉬지 않고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총소리 입니까?”

빨갱이로 밝혀진 사람들을 총살하는 소리 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대답해 주었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으니 산 것이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전시이기 때문에 한 번 결정이 나면 사람의 목숨은 즉결 처분 되었다.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 있어도 끌려가서 총을 맞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루 종일 취조를 받은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빨갱이로 몰리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더욱 불안해졌다.

 

밤 열두 시쯤이었다. 문이 확 열렸다. 방안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대게 이런 경우,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 중에서 빨갱이로 밝혀진 사람들을 데려다가 총살을 했다.

국군 헌병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

데려가서 쏘면 끝이기 때문이다. 방안을 노려보던 헌병이 말문을 열었다.

 

여기 서울에서 온 사람이 누구야?”

해원이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도 뒤따라 일어났다.

안내하는 헌병을 따라 방을 나왔다.

죽음의 직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했다. 지금은 국군이 신의주로 진격 중이다.”

 

 

 

그때서야 우리가 살아난 것을 알았다. 자치위원회 간부 앞에 우리를 세우고 헌병이 말했다.

이 사람들 내일 아침 일찍 내보내시오.”

헌병과 헤어져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 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실로 오랫만에 되지고기국에 밥 한 그릇을 먹었다.

4일간을 내리 굶은 상황에서 먹는 돼지고깃국의 맛이란 내 생애에 그렇게 맛있는 돼지고깃국을 먹어 보기란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제와는 달리 자치위원회 간부들이 담배도 몇 개비씩 주면서 환대해 주었다.

죽음의 직전에 있을 때에는 세상이 그렇게 깜깜해 보이더니 생명의 서광이 비치자 세상은 그렇게 밝아 보일 수가 없었다.

 

저 앞의 들판을 건너 무조건 길을 따라 앞으로 가시오. 60 리를 가면 그곳이 평양입니다.”

 

평양! 그 말에 우리는 용기가 났다. 자치위원회 간부들과 인사를 나눈 뒤 평양을 향하여 걷기 시작 했다. 시월 말이 되었으나 전쟁 통에 추수를 하지 못한 벼 이삭들이 그대로 들판에 깔려 있었다.

불안하기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직도 생명이 촌각에 달려있는 전시라서 가다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 죽을지 모르는 목숨들이었다.

차라리 포로 수용소를 찾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 되었다.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한 차라리 포로 수용소에 가서 우리의 입장을 사실 데로 말하면 쉽게 서울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다섯 시경, 평양 근교의 밭에서 무우와 배추를 뽑아 싣고 있는 국군들을 만났다.

 

내가 6.26 전란이 발발하여 동국대학 앞에서 패잔병으로 도망을 치는 국군을 본 이래 처음 보는 국군이었다.

포로 수용소가 어디쯤 있습니까?”

모른다고 했다. 무우 하나를 얻어 먹고 군인들의 짐을 밀어주며 국군 부대로 갔다.

 

부대에 들어가 뜻하지 않게 하도야마라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했던 중동학교 시절의 물리학 선생님을 만났다. 그 분은 중위 계급장을 달고 대대 공급관을 하고 계셨다.

하도야마 선생님!”

 

처음에는 선생님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중동학교를 다녔다는 말씀을 드리자 그때서야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다.

대충 사정을 말씀 드리고 포로 수용소로 넘겨 달라고 부탁했다.

 

알았다. 걱정 말고 저기 취사장 옆에 앉아 있어라.”

이제는 살길을 찾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에 우리 잎을 지나던 군인 몇 사람이 난데없이 미군 군화를 신은 발로 발길질을 했다.

 

이 놈의 새끼들! 너희들 인민군이지?”

이 놈도 지나다 차고 저 놈도 지나다 찼다. 부뚜막 옆에 쪼그리고 앉은 개를 지나는 사람들이 심심하면 두들겨 패듯 취사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우리들을 개 패듯 팼다.

우리는 멍청하게 앉아 때리는 데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급관을 만나 군인들이 때린다는 말은 못하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야 우선 얻어터지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인들을 따라 민가에 나가 장독을 뒤지며 된장과 간장을 수색했다.

 

찾아낸 된장과 간장을 드럼통에 넣어가지고 부대로 돌아 오는 길이었다.

해원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대령님, 경기고등학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쫄병 생활을 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군대에서 장교는 군계일학(軍鷄一鶴)처럼 빛난다.

내가 주위 계급장을 단 중학교 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하물며 대령이라니! 하늘과 같이 높아 보였다.

 

해원이의 경기고등학교 동기 동창생이었다.

지옥의 길목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국군 5연대 3대대 대대장이라 했다.

 

잘 되었다. 오늘 밤 열 두 시에 평야에서 서울로 떠나는 트럭이 있다. 그 차를 타고 서울로 가라!”

 

신이 낫다. 들뜬 기분으로 부대에 돌아와 서울 갈 시간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거처하고 있던 부대에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순천으로 부대가 이동 한다며 군장을 꾸리기 시작 했다.

 

어허, 이거 큰 일이다. 우리도 순천으로 데리고 가면 어떡하지?”

 

우리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져 서로 쳐다 보았다.

그 때에 대대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3대대장이 부대 공급관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를 헌병대에 인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위기를 넘긴 우리는 공급관과 함께 어느 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헌병대에 가서 그들에게 인수 인계 되었다.

 

그 때 은사이던 공급관이 수건과 담배를 주었던 것이 두고두고 고마웠다.

 

이런 어수선한 절차를 밟는 바람에 밤 열 두 시에 서울로 간다던 차를 타지 못하고 그날 밤은 헌병대가 있는 교실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양면 괘지에 신분증명서를 써 주었다.

 

이 사람들은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이다. 평양에서 사리원을 거쳐 서울까지 통과 시켜라. 평양전투지구 헌병사령관.”

 

전시에 있어서는 최고의 신분증이었다.

이 정도의 신분증이면 서울 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러진 다리가 이어진것과 같이 통쾌한 기분으로 의기양양하게 아침 열시쯤에 헌병대를 나와 대동강으로 갔다.

강을 건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강변에서 나이 드신 영감님 한 분을 만났다.

돈이 없어 증명서만 내보이고 사정을 했다. 흔쾌하게 배를 태워 주셔서 무난하게 대동강을 건넜다.

대동강 강변에는 열 일곱, 여덟 살 정도 먹은 유엔군들이 M-1 소총을 들고 100미터 간격으로 강을 지키고 있었다.

사리원 방면의 도로를 택하여 15리쯤 걸었다.

보초를 서던 군인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고 검문했다.

너희들, 인민군이지?”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인민군이라니! 내가 가지고 있던 헌병사령관의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그 친구는 총은 들었지만 글자를 모르는 군인이었다.

 

이게 뭐 꼬?”

 

증명서를 받아 쥔 그 군인은 경상남도 동래나 울산 근방의 말투로 물었다.

헌병 사령관이 신원을 보증한 증명서라고 설명했다.

글자를 모르는 군인이 내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이런 인민군 같은 새끼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

 

순간 귀중한 증명서를 그 무식한 군인이 쫙쫙 찢어버리고 담배를 빼앗고 내가 차고 있던 성균관대학 허리띠 버클까지 빼앗더니, 1 열 종대로 손을 들고 서라고 했다.

 

앞으로 갓!”

뒤에서 총을 대고 앞으로 가라고 윽박질렀다.

기가 막힌 순간이었다.

이제 증명서까지 없어진 우리는 어디로 또 끌려 가는 것일까?

 

 

 

 

짐승과 거지, 그리고 인간

 

무식한 녀석이 귀중한 신분증명서까지 찢어버리고 M-1 총을 등 뒤에 대고 무조건 앞으로 가라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디로 끌려 가는 것일까?

 

끌려간 곳은 미군 부대였다. 우리보다 먼저 끌려온 오, 육십 대의 남자 3, 4명과 여자 2, 그리고 어린아이 한 명이 있었다.

 

영어는 제대로 하지 못하나 아는 단어들을 꿰어 맞추어 사정을 이야기 했으나, 미군들은 무조건 “NO” 소리만 지르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열 두 시가 되었다.

안남미로 지은 밥을 점심으로 주었다. 안남미란 버어마 지방에서 생산한 쌀로 쌀알이 작고 푸실푸실 하며 장기간 보관하여 오래된 쌀 특유의 냄새가 난다.

평시 같으면 한 숟가락도 먹을 기분이 나지 않겠지만, 그때는 그것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어 살 것만 같았다.

 

저녁 때가 되었다. 미군들이 군용차에 태워 다시 대동강에 걸쳐있는 부교를 건너 평양으로 끌고 갔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처음에는 어딘지 몰랐으나 알고 보니 포로 수용소였고 건물은 평양교화소 건물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라 검둥이 군인들이 판초를 입고 또 어디론가 끌고 갔다.

어느 건물 1층에 도착했다.

 

들어가

 

웬 사람이 이렇게도 많을까? 아마 칠, 팔백 여명은 될 법했다.

우리가 쳐 박힌 건물은 인민군들의 만족을 만들던 곳이었다.

민복이란 겉은 국방색이고 속은 흰색으로 평상시에는 국방색 쪽을 입고 눈이 오면 흰색 쪽으로 뒤집어 입는 솜을 넣어 누빈 옷이다.

 

솜이 지천이었다. 바닥은 시멘트 날바닥이라 차고 냉기가 올랐다.

사람마다 솜덩이를 깔고 덮고 안고 잠이 들었다. 밤 열 한 시쯤 되었을까?

 

불이야!”

깜깜한 밤 중에 건물 안은 이 난데 없는 외마디 소리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피운 담뱃불이 솜에 붙어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아닌 밤 중에 난리가 나자 2층과 3층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불길을 뚫고 아우성치며 아래층으로 다투어 내려 왔다.

보이는 것이 없었다.

힘이 약해 넘어져 있는 여자를 비롯하여 십여명이 현장에서 깔려 죽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다행이 1층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아비규환의 수라장에서 나오는 데로 군인들은 수용인들을 다시 군용 트럭에 실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아 서울까지 가자던 우리들은 이 와중에서 헤어지고 말았다.

 

이동한 곳은 굉장히 넓은 곳이었다.

누군가가 평양 방직공장이라 했다.

견고한 바닥에 함석으로 지붕을 입힌 건물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컸고, 그런 건물이 20여 동이나 있었다.

전기 트란스는 서넛 사람이 손을 잡아야 할 만큼 켰고, 그런 트란스가 한 동에 10여 개씩 있었다.

 

이튿날 아침, 100명씩 조를 짜서 소대를 구성했다.

 

나는 소대장에 지명이 되었고, 이어서 영어를 아는 사람으로 차출되어 부대 본부로 갔다.

수용된 사람들의 명단을 영어로 작성하라고 해서 만들어 주었다.

 

내가 살아서 서울까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판단 하였던 포로 수용소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밥은 하루에 두 끼를 주었다.

 

까지 않은 수수를 드럼통에 놓고 물을 붓고 끓여서 조그마한 접시로 손바닥에 하나씩 퍼 주었다.

수 백 명이 줄을 서서 수수 쌂은 것을 받아 먹으려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인간이 아니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이며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소량의 수수 쌂은 것으로 연명 했다.

 

배 고프다고 급히 먹은 사람은 심한 설사를 하다가 죽어 나갔다.

 

11월이라 날씨는 춥고 배는 고파 어떻게 해야 비 밤에 죽지 않고 내일을 맞이 할 수 있을지 밤만 되면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죽음이 바로 내 앞과 곁과 두에 붙어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소대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체온을 유지하며 밥을 지새웠다.

이렇게 밤을 지내고 나면 한 소대에서 하룻 밤에 두 세 명씩 죽어 나갔다.

 

나는 명색이 소대장이라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중간에 끼어 있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낮이 되면 열 명 또는 스무 명씩 짝을 지어 작업을 나갔다.

 

대개는 국민학교 교실 같은 곳을 청소하거나 짐을 나르는 일 이었다.

 

그러나 말이 작업이지 죽지 못해 하는 짓이요, 시키는 작업 보다는 쓰레기 통에 양키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뒤져 서로 먹으려고 난리를 피우는 일로 일관 되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녀석이 쓰레기 통에서 먹다 남은 사과 한 쪽을 발견하고 먹으려고 하면, 힘 센 놈이 쫓아가서 패고 빼앗아 먹으며 그나마 빼앗기지 않으려고 입에 물고 도망치는 이 군상을 어떻게 인간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 후 남방에서 패잔병이 된 군인들이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극한적인 배고픔으로 시달리며 살다보니 그런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처절한 전시의 인간사회로, 군인과 민간과 포로의 차이는 뚜렸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지성이 칼날같이 빛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시의 군인한테는 추풍낙엽이었고, 포로는 인간 이하의 대법을 받으며 갖은 곤혹과 위협을 시시 때때로 받아야 했다.

 

한번은 한 녀석이 유효기간이 넘은 통조림 통을 쓰레기장에서 발견하였다.

깡통을 따고 내용물을 허겁지겁 삼키고 있을 때 미군이 왔다.

갓 뎀!”

 

무자비한 비정한 군인 이었다.

배가 고파서 먹고 있는 깡통을 빼앗아 그대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

피가 낭자 했다.

나는 우리 소대원들이 무식한 미군들한테 멸시 당하는 것이 싫어서 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레기 통을 뒤져 먹지 말라고 당부 했으나 결국 이런 일이 일어 났다.

 

거지가 아닌 우리가 쓰레기를 뒤져 먹어야 하고, 짐승이 아닌 우리가 말썽부린 개처럼 얻어 맞고 찍히고 피를 흘려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 어려운 환경에서 늘 어머님 생각을 했다.

어머님은 고향에 계실 때에 새벽 두 세 시만 되면 언제나 일어나 맑은 물로 목욕을 하시고 집에 모셔 놓은 부처님 앞에 수없이 절을 하시며 불공을 드리셨다.

속 병을 앓고 계신 아버님을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행방불명 된 이래 소식이 끊긴 나를 위해 오늘도 어머님께서는 불공을 드리고 계시겠지...”

내가 만일 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고향에 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어머님의 정성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 이런 고생을 하는 동안 나는 속이 아프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죽지는 않겠지. 천천히 오래 씹어 먹고, 더러운 것은 먹지 말자.”

 

이 열악한 환경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가는 길은 이 길 밖에는 없었다.

매일 같이 죽어 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며 수 없이 내 자신에게 다짐 한 말이다.

 

내가 온전히 살아서 가정에 돌아 갈 수 있으려면 포로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은 실상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인간이 아닌 거지 대접을 받아야 하고, 거지도 아닌 짐승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포로 수용소 였다.

 

 

 

()과 사()의 길목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쟁과 평화!

해방과 전쟁...

 

전쟁은 인류의 적이요, 평화는 인류의 영원한 희구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평화에 앞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었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은 우리 민족이 36년간 희구에 온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땅 우리민족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려 곧바로 전쟁이 터졌다.

 

이 또한 인류와 우리 민족의 희구에 반하는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터진 후 전쟁으로 수난 받던 남북의 젊은이 들이 포로라는 이름으로 남쪽 바다의 한 섬에 갇혀 우리 민족의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연출하고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거제도 포로 수용소였다.

 

 

 

나는 그 해 시월, 그러니까 1951년 가을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포로의 신세가 되어 이 섬에 갔다.

 

 

 

그곳으로 가기 전, 부산 서면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 여름이 되면서 포로들에게 외부와 통신이 허가 되었다.

 

 

사람마다 자기 집으로 편지를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도 부모님께서 계신 고향집과 처자가 있는 서울 집으로 편지를 쓰려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고향에 쓰자니 공산군이 휩쓸고 지나간 고향에 좌익들이 준동하여 그 경황 중에 부모님께서 어찌 되셨는지 모를 일이며, 서울에 쓰자니 학교 간다고 나간이래 아내와 철부지 핏덩이만 놓고 북으로 끌려갔으니 생사가 어찌 되었는지 그 또한 모를 일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서 무얼 하랴!”

나는 편지를 쓰지 않고 백방으로 부모님과 처자의 생사를 수소문 했다.

 

한번은 우연히 포로 수용소에서 고향인척인 김창휴를 만났다.

어찌나 반가운지 손을 잡고 소식을 물어 보았다.

 

고향에는 별일이 없을 거야, 그렇지만 서울 소식은 나도 모르겠네.”

마음은 착잡한 가운데 매일 부두로 하역 작업을 나갔다.

 

부두에 들어 오는 배는 거의 일본 배였고, 한국전에 보급되고 있는 물품들도 일제가 많았다.

 

하역작업을 하면서 일본 선원들과 선장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호의로 배에 올라 선장실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가자! 우리가 데려다 주겠다.”

가까워진 일본 배 선장과 선원의 제의 였다.

 

한국은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으나 일본은 평화의 땅이었고, 실제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일본 배에 올라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나는 고향과 서울의 소식을 듣고, 우리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확인 하기 전에는 일본에 갈 생각이 없었다.

 

거제도로 실려가 배에서 내리자 마자 뭉텅이로 잘라 62수용소라는 곳으로 처박아 넣었다.

 

 

 

인간이 인간임을 자부하려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시의 포로는 그럴 수가 없다.

가라면 가야하고, 타라면 타야 하며, 내리라면 내려야 했다.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했던 포로는 이미 제 뜻 데로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62수용소의 분위기는 내가 그 동안 갇혀 있던 다른 수용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수용소 포로들은 하나 같이 인민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꼭 도살장에 끌려온 소나 돼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잘못 온 것 아닐까?” 혹시 다시 북으로 끌려 가지는 않을는지...”

가슴이 뜨끔했다.

 

온몸에 공포의 전율이 흘렀다.

 

북에서 온 공산군 포로들은 물론이고, 고향이 남쪽인 포로들 주에서도 북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북이 지상 낙원인줄 알고 공산당 예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인민군 부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색 지대였다.

 

큰 일 났다. 살길을 찾는다는 것이 결국 죽을 길을 택했구나!”

 

탄식이 절로 났다.

그러나 어떠한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낌새를 눈치채게 하면 그 날로 목숨이 달아 날것이 틀림 없었다.

이런 환경 이런 때에는 옛날 서양의 격언인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입을 꽉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 잔당들이 운영하고 있는 62수용소는 공산당을 모르거나 다른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보면 홀릴 만큼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이 수용소에 미군측으로부터 보급품이 올 경우이다.

 

그들은 물품을 받으면 우선 연대 게시판에 피복은 몇 벌이요, 레이션은 몇 개요, 담요는 몇 장이라고 소상하게 써 붙이고, 이중 각 중대로 무슨 품목이 몇 개씩 할당되어 내려 갔다고 공개했다.

중대 또한 연대에서 받은 보급품을 이런 방식으로 공개해서 각 소대로 내려 보냈다.

 

중간에 없어지는 물품이 없었다.

다른 수용소 같으면 대개는 연대에서 접수한 보급품이 소대까지 내려오는 도중 중간에서 어떤 놈이 먹었는지 모르게 반 밖에 내려 오지 않았다.

 

인간사회는 흔히 의식주(衣食住)라 하여 입는 것을 제1로 치고, 그 다음에 먹는 것을 치며 마지막으로 사는 것을 꼽는다.

그러나 포로 수용소 생활은 그렇지 않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가 순서이다.

 

먹는 것이 제1이고 그 다음이 입는 것이며, 사는 것이라야 똑 같은 천막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하는 포로들에게 공급되는 먹는 것을 빼앗아 떼어 먹는 놈이 없으니 얼마나 좋아 보였겠는가?

 

공산 사회는 이렇다. 하나도 빼먹거나 착취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공산 사회다. 우리는 곧 지상 낙원인 북으로 간다!.

 

공공연히 이런 말이 떠돌고 공산당 예찬 분위기가 수용소를 지배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본 북은 그러한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조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나는 인민군에 징용되었다가 탈출하여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는 남쪽 사람이었으므로 내 전력이 탄로나면 이들 앞에서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언행을 조심 하면서 한달 쯤 지났을 때였다.

 

하룻 저녁은 자고 났더니 옆에 있는 분대에서 자던 사람이 없어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밤 중에 나간 사람이 남겨두고 간 소지품조차 찾으러 오지 않았다.

 

그 사람, 그날 저녁에 죽었어요.”

누군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섬뜩 했다.

 

중대 본부에서는 한 달 전부터 포로들의 조사 한다고 하더니, 심사 결과 전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데리고 나가 죽인다는 것이다.

 

 

 

나는 잠을 자느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살그머니 귀뜀해 주었다.

 

가마니 꿰는 갈구리 있지 않소? 그걸 가지고 와서 밤중에 자는 사람들 중 불순분자로 심사된 사람을 골라 현장에서 목을 찍거나 밖으로 데리고 나가 찍는 거요.

그러면 찍힌 사람이 소리도 못 지르고 숨이 끊어져 죽지요. 죽인 다음에는 침낭이나 담요를 두루르 말아 변소통에 잡아 넣지요. 그렇게 없어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처절했다.

 

변소는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100평 규모의 큰 변소 였다.

 

사람을 죽여 뚜껑을 열고 넣으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후에 그렇게 된 사람들의 시체가 변소통에서 나왔지만 그 때는 이미 그 사람의 생명이 없어진 뒤의 일이요, 그런 사실이 발견 되었다 해도 이 치외법권(?)적인 이 무법지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나도 그런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아서 보지 못한 일이지만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한 사건이 벌어진 곳도 내가 수용되어 있던 62수용소였다.

 

나중에 발견 된 것이지만 62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대장간까지 만들어 놓고 수 백개의 창을 제작했을 정도였다.

 

포로 수용소 대장이 포로들한테 납치가 되자 삽시간에 미군 헌병과 한국 헌병들이 수 백 명 씩 몰려와 수용소는 한때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헌병 수용소와 같았다.

 

 

 

이 후 강화된 경비와 함께 파견 초소가 늘어 났다.

 

하루는 새로 생겨난 파견 초소 근방엘 가 보았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교인들을 수용하는 천막이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미군이 책임자였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곳, 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62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하여 꾀를 내었다.

헬로우 켑틴!, 아임 크리스챤 써~.”

 

나는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 교인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이런 현장을 공산당들한테 들키면 당장에 끌려가 죽을 짓이었지만 다행히 나의 행동은 공산당 포로들 한테는 들키지 않았고, 거짓 예수쟁이 행동을 인정해 준 그 대위의 도움으로 생지옥에서 구출되어 교인 천막으로 이동했다. 천막 안에는 약 20여 명의 다른 포로들이 있었다.

대개는 이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3일만에 65수용소로 이송 되었다.

 

65수용소는 62수용소와 달리 철저한 우익 포로 수용소였다.

명령 계통이 추상 같았다.

65수용소 오던 날 그 추상 같은 분위기가 내게 엄습했다.

 

너 빨갱이 간첩이지?”

 

아닙니다.”

 

뭐라고? 이 자식 봐라!”

 

무조건 간첩이라고 두들겨 패는 것이 심사의 첫 단계였다.

 

어찌나 맞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기구한 운명이여!

, 기구한 나라여!

, 기구한 민족이여!

 

 

 

 

5편 인생 전환

 

몇 달 만인가?”

 

 

거짓을 부려 잠입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겠지만 나는 북에 있을 때도 무조건 맞아야 하는 일을 당하였고, 이남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일을 달하였다.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빨갱이라고 패고,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이라고 패니, 맞아 죽어도 인정을 받을 때까지 얻어 맞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심증이 갔는지 소대에 배치했다.

 

전시에 군인은 할 일이 많지만 잡일과 궂은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이 맞겨지지 않았다.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은 65포로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맡겨진 일은 똥통을 메고 십 리 밖의 바다에 나가 버리는 일이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그 지독한 냄새가 나는 변소에 가서 인분을 드럼통에 퍼 넣고 돌개바람에 시달리며 그 먼 곳까지 메고 가서 해변에 버리는 일은, 실로 대학을 다니던 지성인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으나, 운명처럼 내 어깨에 메워진 똥통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작업을 독촉하며 감시하는 헌병들의 눈초리는 모질고도 모질었다.

 

내가 인민군들이 득실대는 수용소에서 우익이 있는 65수용소로 온 것은 순전히 가짜 예수쟁이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교인 행각은 계속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교인이 아니라는 것이 탄로나면 그 때는 진짜 간첩으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생명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옥 목사라는 분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한 달 후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이 제일 좋다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상으로 주었다.

그런 다음 중대본부에서 교육을 담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국민학교 5, 6학년 과장의 사회와 과학, 그리고 국어 교육이었다.

 

중대 본부에서 교육을 담당하면서부터는 그 지독한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는 포로들은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침, 남북의 포로가 곧 교환 된다는 소리도 있어 온 신경이 그 문제에 다 모아 졌다.

벌써 포로 교환을 위한 1차 심사는 있었다.

 

출신지와 연고지를 파악하는 심사였다.

하루는 심사관의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내일 이 심사관을 찾아가 보시오.”

이 심사관? 아마 당시 계급이 대령이었을 것이나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왜 부를까?

 

다음날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심사관실에 갔다. 이대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묻는 데로 고향과 가족, 그리고 학력 등에 관하여 진술했다.

 

내 진술이 끝난 후 한참 있다가 이 심사관이 말했다.

 

내일 아침 9시에 남쪽 철망에 가서 수건을 오른손에 들고 흔들어라. 그러면 전방에 두사람이 보일 것이다. 그 중 톰비를 입은 분이 너의 아버지다.”

 

아버지? 남데 없이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소리에 기가 막혔다.

 

이 얼마나 그리던 부자간의 만남이란 말인가?

 

이 소리를 듣고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가 되기만을 기다려 남쪽에 설치되어 있는 2중 철조망 앞으로 갔다.

심사관이 시킨 데로 오른쪽 손에 수건을 들고 흔들었다.

 

수용소가 있는 곳은 좀 높은 곳 이었다. 멀리 칠팔백 미터 거리의 좀 낮은 곳에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두 분이 보였다. 그 중 한 분이 손을 흔들었다.

 

아버님이셨다.

 

 

말 한 마디 전할 수 없고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아버님과 나는 수 없이 수건만 흔들며 서로의 생존 사실만 확인 했다.

되돌아 서지 않는 발길을 돌려 수용소로 오면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아버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어찌 되셨으며 서울 식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포로 교환을 위한 1차 심사 때에 나는 학생 신분으로 끌려 갔으므로 군인이 아니라 민간 억류자로 분리 되었다.

 

그런 사실이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 되었고, 방송으로 민간 억류자의 리스트가 공개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없어서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후에 라디오 방송을 들은 사람이 아버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셨던 모양이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거제도에 오셔서 수소문 끝에 이 심사관의 친척인 이종호 씨를 찾아가 부탁했다는 것이다.

 

내가 철조망을 통하여 멀리 계신 아버님을 뵐 때 옆에 있던 분이 바로 이종호 씨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님께서는 내가 행방불명 된 다음에 매일 불공을 드리는 것은 물론이요, 용한 점쟁이가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서 자식의 생사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글쎄 점쟁이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지는 모르나, 어떤 점쟁이도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살아있다고 점을 쳤다고 한다.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수용소는 형무소보다 더 어려운 곳이라 했다.

 

나는 형무소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사람이 갇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처음 경험하는 것이지만 철조망 사이로 민간인을 보면 미칠 것만 같았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나는 왜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나!”

자유의 고귀함을 절감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자유주의자의 절규가 쉴 새 없이 귓전을 울렸다.

 

아버님을 뵌 후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욱 심해졌고, 서울 식구 안부가 더욱 더 궁금했다.

밤 마다 아내 생각, 자식 생각, 자유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어떻게 하면 이 억류의 철망을 뚫고 저 밖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석방

 

포로들의 개별적인 심사는 몇 달간 계속 되었다.

심사관 한 사람과 포로 한 사람이 마주 앉아 11로 일체의 강요를 배제한 채 자유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포로들이 선택할 길은 세 가지 중의 하나였다.

 

이남에 살고 싶은 사람은 이남으로 가게 하고, 이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이북으로 보내고, 이남도 이북도 다 싫은 사람은 제3국을 택했다.

 

나는 고향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피력해 놓고 수용소에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초겨울의 날씨라 으스스하던 날이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보낸다며 짐을 싸도록 했다.

“2중 철조망을 나가면 광장이 있다.

 

   

 

그 광장의 한 복판에 철조망이 처진 1미터 정도의 길이 있고, 거기서 더 가면 또 길이 있다.

그 곳에서 당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

 

만일 남과 북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제3국을 택한 사람이 있다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된다.”

 

이것이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포로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였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따리를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뒤를 보고 좌우를 보고 앞으로 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뿐이었다. 썰렁한 분위기 때문에 묘한 생각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길을 따라 한 500미터를 걸었다.

 

거기에 남북으로 갈라진 길이 있었다. 운명의 갈림길이다. 나는 남쪽 길을 택해 100미터쯤 걸었다.

드디어 길이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남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와 민간 억류자들은 남과 북, 그리고 제3국을 택한 세개의 새로운 집단으로 갈라졌고, 그 집단들마다 다시 부대를 편성하여 수용하였다. 그 후 한달 쯤 지났을 때 이남을 택한 사람들은 한 많은 거제도에서 배를 탓다.

 

생과 사의 협곡을 누비던 수용소 천막이 멀리 보였고 갈매기도 사연을 아는지 우리가 탄 배에 떼를 지어 날아와 끼룩끼룩 날갯짓을 하며 환영의 춤을 추고 있었다.

 

거센 파도를 가르며 배는 전진했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다고 한들 내가 서울에서 끌려간 다음 지금까지 걸어온 길 보다 더 거셀까?

배는 어느 사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항은 내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륙한 항구였다.

 

 

한번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상륙하였고, 이번에는 6.25사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상륙하는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배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탓다.

 

우리가 내린 곳은 영천 역으로 우리들은 역 건너 주남들에 설치해 놓은 수용소로 이동 했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집에 다 온 기분이었다.

 

이때에 이승만 박사의 반공포로 석방설이 들렸는데, 후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다.

또 긴장이 풀렸다.

 

이번에는 난데 없이 야맹증(夜盲症)에 걸렸다. 갑자기 평평한 땅이 움푹움푹 패인 것처럼 보이고 전깃불의 촛점이 흐려져 보이고, 천막줄도 두겹세겹 여러 겹으로 보였다. 밤마다 눈 뜬 봉사가 된 것이다.

 

그 때에 대구대학을 나와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애 제자이며, 경주고등학교 교사와 경주의 도의원을 역임한 바 있는 인품 좋은 정규섭 매부가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헌병대 통해 알았다.”

 

오래 간만에 만난 매부를 통하여 그 동안 집안 소식과 고향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매부는 내가 심한 야맹증에 신음하는 것을 보고 무척 마음이 상해서 돌아가셨다.

밤이 되면 나는 눈뜬 봉사가 되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회에 나가면 절대로 음식 투정을 부리지 않겠다.

 

만일 전과 같이 어떤 음식은 맛이 있고 어떤 음식은 맛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천벌(天罰)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 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에 부유할 수도 있고 빈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백짓장 한 장의 차이 밖에 없다. 흔히 사람들은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하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이 역시 맞는 말이 아니다. 인간에게 불행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똑 같으며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다.

 

거지는 괄시하고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아부하는 군상이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헛 된 일이다.

인간이 이지경이 되고 보니 돈과 권력, 빈궁과 부유가 모두 허사가 아니던가?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세상에 나가면 천금이 내 눈 앞에 떨어져도 내 것이 아닌 이상 내가 갖지 않아야 한다.

돈은 자기가 벌어서 써야 하지, 부모가 주는 것을 받아쓰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밖에 나가더라도 이제는 부모님의 은혜 밑에서 생활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겠다.

앞으로 나 삶은 내 자력으로 이끌어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부부 싸움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나가면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이 난리 통에 부모와 부부 이외에 그 누가 나를 두고 그렇게 애를 태운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집에 갈 날만 기다리며 이런 자성(自省)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내일 면회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누가 온다는 것인지 전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면회 하루 전에 통고해 주는 것이 이 수용소의 묘한 관례였다.

 

누가 왔을까?”

 

그리던 어머님과 아내, 그리고 누이와 매부가 왔다.

2년 만에 만나는 어머님이요 아내요 누이였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울기만 했다.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서울에서 대구 친정 댁으로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천만 다행이었다.

 

어머님과 아내는 지어온 야맹증 약통을 놓고 풀려나는 데로 집에서 만나자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 갔다.

3월경이다. 나는 민간 억류자이기 때문에 제1차로 석방이 결정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영천에서 곧 바로 석방되지 않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고향은 경상북도 봉화지만 포로 심사 결과 출신지가 서울로 되어 있고, 수용된 포로들은 석방이 된다고 하더라도 출신지가지 단체로 가서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나는 생각했다.

 

석방이라니?”

 

내가 왜 누구한테 무슨 짓을 하다가 구금되었길래 석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나라가 난리가 났다는 것 외에는 어느 조건으로도 풀지 못 할 징용이요 구금이요 석방이었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시 복구 되지 않은 때였다.

 

 

기차는 서울역까지 오지 못하고 영등포 역에서 섰다. 어느 국민학교 교실로 옮겨져 하룻 밤을 새우고, , 이천원의 여비와 함께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집으로 가라

 

너무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었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좀 어처구니 없는 말과 같이 들렸다.

다음 순간 부푼 가슴이 되어 함성을 지르며 우르르 뛰어 교문 밖으로 나왔다.

이 얼마나 그리고 그리던 석방이며 자유란 말인가!

 

석방이다. 석방!”

자유다 자유!.”

 

하늘이 찢어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